2013-02-14
정의란 무엇인가 - 철학이 설명 못하는 보편성
공부가 안되니 별 짓을 다 한다. 하지만 재미있고 생각을 정리해 나갈수록 더욱 복잡해지는 것이 이 분야인지라 관심있게 지켜봤다. 15분간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꾸며나가는 능력도 보통 능력은 아니니까 말이다.
가장 먼저 정치에는 정의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정의에 위배되는 선택도 해오고 있으며, 이를 국민들에게 물어 지지받는 절차를 통한다. 그렇다면 미국 국민들은 자신의 선택에 대해 잘 알고 있을까? 최근 애플-삼성간의 판결에서도 보듯, 그렇게 믿을 뿐이다. 비록 자신의 선택의 정의는 아닐지라도 정의에 가깝다고 믿는 것이고, 그래서 아직도 그 대단한 미국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로 강의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나라가 나서서 '정의롭게'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이유는 뭘까? 이는 그들 자신(의 선조들)이 그 정의 때문에 배를 타고 새로운 대륙으로 건너왔고, 총기 소지를 합법화할 만큼이나 개인들의 구체적 정의에 몰두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면에서 보면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오래 전부터 한반도에 자리잡아왔고 다른 민족의 침략을 받아왔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이렇게 생각을 전개하다 보면 정의가 모종의 이익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의가 이익에서 나온다는 생각은 사실 참 어려운 이야기다. 이익이라는 것이 있다고 인정하면 어떻게 될까? 이익이라는 것이 불평등한 관계를 만드는 건데, 이게 절차든 결과든 정의로울 수 있을까? 아무 근거 없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롭든 아니든 그가 가진 이익으로 판단한다는 논리가 가장 직관적인 해석인데, 이걸 '주관'이나 '인격'이라는 말로 피해나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이에 따르면 표창원 강사는 '전 경찰대 교수'라는 직함 자체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이며, 그 스스로가 왜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는가를 말하는 것 자체가 절차적 정의에 위배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리고 있어 자신의 판단에 대한 결과를 예측하지 않았고 (또는 외면했고), 강사 자신은 '심판'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심판은 잘못할 경우 권위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니 이에 따라 정의의 여신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여기서 논리의 비약에 생기는데, 정의의 여신처럼 '절대적 정의'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누구도 사람 사이에 심판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보이는 것만으로 절차적 정의를 '정의'할 수 없게 되고, 무언가 숨은 것이 있다고 보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삶은 결코 정의로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배분적 정의에 전적으로 찬성할 수 없는 까닭은 배분을 받을 사회의 소위 '최하층'을 판단하는 부분이다. 만일 이 부분을 그들 자신이 아닌 (그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판단하면 정의롭지 못한 것이 되며, 또는 바로 그들 자신이 판단하기에도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목적없이 (눈을 가리고) 퍼붓지 않고는 배분적 정의를 실현할 수 없으며, 이래서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제한된 재화를 운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목적을 위해 수단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지, 개인의 감정을 사회 전체로 퍼뜨리고 있지는 않은지 먼저 자신을 수양해야 하지 않을지. 더불어 정의를 절대적 목적과 개인의 편견에서 찾지 말고 좀 잘 살아보고 나서 칭찬이던 후회던 하시던가. 그래서 15분동안 사람이 바뀌고 이에 따라 세상이 바뀌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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